백백교(白白敎) 와 백두혈통(白頭血統)

 

일제시대에 종교의 탈을 쓴 희대의 살인광란집단이 있었다. 이른바 백백교(白白敎)이다.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나면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집단과 유사한 면이 많다. 김씨왕조가 무지한 백성들을 볼모로 갖은 악행을 일삼고 테러에 납치극이며 기쁨조 같은 파렴치한 엽색행각까지 행하여 오지 않았는가. 백백교의 실상을 알고나면 북한의 백두혈통교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미친다. 불쌍한 북한 주민들은 백백교의 불쌍한 신도들이나 다름이 없다는 순간 가슴이 미어짐을 느낀다.

 

<전정운~전용해 백백교주>

<백백교 사건 전말>

황해도 신천 사는 한 젊은이 유곤용은 할아버지가 임종에서 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나는 약방을 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모았으면 천석 추수는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데

백백교를 믿는 바람에 오늘 이같은 파산지경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지 2년후 백백교의 수렁에 깊이 빠진 아버지가 유군의 18세된 누이동생 유정전을 백백교 대원님의 시녀로 바친 것을 뒤늦게 알았다. 대원님은 교주요 색마인 전용해(42)를 부르는 신도들의 존칭이다. 대외호칭이 시녀일 뿐 많은 시녀의 환시속에 성적 가학으로 변태성욕을 충족시키는 첩이다.
 

분통을 참을 길 없는 유곤용은 이 소굴속에 들어가 한번 맞부딪혀 보겠다는 결심으로 백백교의 아지트들인 양평 양주 연천 화천 평강 철원 안변 금화 등 소위 9개 본소를 변장하고 탐방했다. 백백교의 종말론과 그에 수반된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 재산을 모두 바치고 처자식을 첩으로 바친 다음 이 본소에서 화전을 가꾸며 종말을 기다리는 암울한 인생집단들인 것이다.

유군은 독실한 신도인 아버지와 첩이 된 누이동생을 통해 대원님의 승안을 교섭했다. 백백교 가문에서 혼자만 믿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으며 그동안 해주에서 약종상을 해서 번 3만원을 헌금할 뜻을 비치고 인삼 녹용을 선물로 보내어 믿음을 다졌다. 철통같은 보안을 하고 그 보안을 위해 수백명을 살해온 살인마도 유군의 함정에 걸려들기 시작했다. 서울 하왕십리에 있는 유군의 아버지집에서 밤 12시에 승안을 허락받고 살인 기술자들인 참모 이경득 문봉조 등을 대동 하고 나타났다. 승안을 위해서 유군은 시킨대로 사흘동안 목욕재계 외출않고 근신을 하고 승안 규칙준수를 서약했다. 첫째 대원님 얼굴을 보지 말것, 둘째 호주머니에 아무것도 담지 말것, 셋째 묻는 말 이외에는 아무말 하지 말것, 넷째 그의 명령이면 이론을 달지 말고 승복할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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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해는 늠름한 체격으로 머리통이 보통사람보다 곱절이나 컸다. 그래서 상점에서 파는 모자치고 맞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음성은 굵고 가는 것을 자유롭게하여 사람을 홀리기에 십상이었다. 유군을 만나자 처남 매부사이에 만남이 너무 늦었다하고 술상을 차려오라 시키더니 취하기를 기다려 유군에게 「10만원을 번 것으로 안다. 내게 바치라」고 했다. 이에 유군이 4년후면 10만원이 될 것이니 그때 바치겠다고 하자 「내 분부를 쫓지 않겠다는 거지」하며 곁에 앉아있던 애첩 정전에게 「네 오라비 심났다」 하며 그가 항상 휴대하는 오덕도를 빼어 찌르러 들었다. 유군은 이 때가 바로 기회로 보고 몸을 날려 발길질로 교주를 차 쓰러뜨렸다. 전용해가 「사람살려」를 연발하자 밖에서 망을 보던 참모들이 들어와 난장판을 이루더니 교주를 둘러업고 달아났다. 몽둥이 들고 뒤쫓아 왕십리 보통학교앞까지 추적해 휘두른 몽둥이에 이경득이 이마가 깨지기도 했다. 그길로 왕십리파출소에 달려가 신고를 하고 백백교 대검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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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를 캐고 보니 감자 줄기따라 줄줄이 드러나는 가공할 죄악에 전세계가 놀라 외국 기자가 특파되기까지 했으며 20년대 세계 사건 10대뉴스가 되기도 했다. 공판기록에 보면 백백교 참모들인 피고인이 총 24명으로 전기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는 49회에 걸쳐 129명을 살해하는 등 그중 18명이 314명을 살해 암매장한 것으로 돼있다. 자살미수를 한 참모 정봉조가 회복되어 신문한 결과 주범인 전용해는 용문산 본소 곧 양평군 단월면 행소리에서 도피중 자살했다는 진술을 받고 용문산 일대를 수색한 결과 그토록 많을 인명을 살상했던 오덕도로 자결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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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많은 인명을 살상해야만 했던가. 백백교의 뿌리를 소급해 오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1900년 평북 영변 사람인 전정운이라는 이가 함경도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에 백도교라는 유사종교를 창설했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하고 종말의 날이 닥치면 서양은 불로, 동양은 물로 심판받아 인류가 멸망한다 하고 이 종말에서 살아날 길을 제시한다. 팔도 53곳에 정해놓은 백도교의 본소에 가서 살다가 물심판의 날이 오면 금강산에 있는 피수궁으로 옮겨가고 그 곳에 기다리고 있으면 대원님이 하강하셔 소원에 따라 두패로 갈라 인도 하신다. 동해 천리밖에 둘레 3000리의 영주땅이 솟아 오르는데 그 곳에는 봉황과 기린이 놀고 불로초가 자란다. 불로장수하고 싶은 자는 그 영주땅으로 인도하고 벼슬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 그 곳에서는 대원님이 임금이 되어 헌금이나 헌신도에 따라 벼슬이 주어진다고 했다. 전정운은 이를 믿는 우중이 바치는 재물로 호의호식하다가 가평 화악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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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교권다툼으로 백도교는 삼분열을 한다. 둘째인 전용해가 백도교의 정통을 이어 백백교로 이름을 바꾸어 전 조직을 계승하고 맏인 전용수가 인천교를 아우 전용석이 도화교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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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는 표면상 관헌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정상 종교인양 십오계 기도일 등을 정하고, 1 2세 하는 선출 교주제와 근대화된 포교소 제도를 도입한 척했지만 배후에서 자신이 비범한 신격을 지닌것 처럼 조작, 조작극으로 마음을 휘잡는 한편, 재산 갈취와 피갈음으로 인한 이탈방지 그리고 들통날 우려가 있으면 여지없이 살해하는 공포 운영을 했다. 신도가 걸려들어 재산과 재물을 바치면 서울역 앞 경성하숙옥 청량리역앞 대흥여관에 묵게한 후 소위 생문방인 양평 양주 연천 철원 평강 영동 안변 등지의 오지에 화전 가꾸며 살 수 있는 본소 산막에 이주시킨다. 가공할 살해 암장이 저질러진 동기를 가려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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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주 전용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경우 2) 믿음이 약화되어 배신할 기미가 보이는 경우 3) 숨어서 불평을 하거나 탈교할 기미나 우려가 있다고 밀고된 경우 4) 간부나 신복 첩의 태도에 약간 변화가 생겼을 때 5) 재산을 모두 헌금했다 해놓고 남은 재산이 있음이 발각되었을 때 6)살인극이 탄로날 조그만한 기미가 포착되었을 때 7) 공범 만들기 수단인 피갈음을 거부한 경우 8) 공범을 만들고자 살인에 참여시키는데 이 살인공범이 아닌자로서 살인 내막을 알고 있는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산중으로 연행되어 구덩이를 파게 하고 난데 없이 밀어뜨려 그 구덩이에 생매장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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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는 항상 복수신도를 동원 공범을 만들었고 교주가 버린 첩은 간부가 돌리고 간부의 피갈음이 끝나면 본소로 돌려 신도 모두에게 돌려 윤간공범자로 만들어 이탈할 마음을 먹지 목하게 한 것이 교세를 유지시키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도피 자결하기 직전 그가 살던 경성 앵정정 마굴에는 32명의 첩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 집안에 노루 기르는 우리까지 만들어 노루 피로 보신을 했다. 아기가 생기면 운신에 방해가 되고 정이 붙어 신격이 손상된다 하여 병아리 죽이듯 영아 살해도 서슴지 않았던 살인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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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선천 사는 간부 신도 이덕의 경우를 보자. 행동이 수상하여 세간을 뒤져보니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백백교 폭로의 편지 초안이 발견되었다. 이 일가족 살해의 명령을 받은 문봉조는 그 가족뿐 아니라 12촌 친족까지 생매장하고 업힌 아기까지 죽이려하자 공범자인 간부가 아기가 무슨 죄입니까고 살려주자고 동정심을 발휘하자 그 간부마저 현장에서 살해하고 있다. 살해 장소는 그들이 종말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여있는 본소로 서울 한복판에서 여의도 비행장 그리고 무주구천동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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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 전용해는 신도로 하여금 그의 신격을 인정시키기 위한 살인 연극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테면 본소에서 신도들을 불러모아 마당에 엎드려 기도하게 하고 속에 흑심을 품는 자는 나의 신통력으로 천벌을 받아 일어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언 하고 모두 일어서라고 시킨다. 그중 한 신도가 일어나지 못하고 엎드려 있는지라 가서 발길질하니 죽어 있었던 것이다. 전용해는 미리 한 신도를 소리 못내게 죽여 엎드리게 해놓고 이 기도 연극을 벌여 신통력을 과시, 이탈을 방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2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여느 때와 같은 기력을 과시, 신도를 홀리기도 했는데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고도의 사기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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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민간에서 굳게 믿고 있는 「정감록」에 합리화시키는 억지 이론에 무지한 신도들은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정감록」에 「전라도운봉두류산 성인출어함양림중」이란 대목이 있는데 이는 전씨가 도를 열()고 운(=)을 만(=)나고, 성인이 출현한다는 함양림은 그들 교가 창시된 함경도 운림면 마양리라고 강인부회했다. 그는 주기적인 제일을 만들어 이날 천제가 불러 천기를 내리신다 하여 계룡산 산상의 천제단에 올라 기를 받는데 마치 간질병 발작하듯이 몸을 꼬고 기성을 지르기도 했던 것이다.

 

 

[신동아 관련기사 참조]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02/16/200602160500005/200602160500005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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