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海戰에서 軍神이다.세계 海戰史에이순신 장군처럼 軍神으로 추앙받는 인물도 없다.
오직 그분이 살았던 이 땅에서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애석하지만.1964년도 일본에서 발간한 "일, 한, 중. 3국연대 역사와 이론" 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장수 도고가 러일 전쟁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연회석상에서 어느 기자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다."영국의 넬슨과 비교한다면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도고장군은"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우리함대는 러시아 발틱함대의 1/3에 해당되는 적은 규모로 그들과 싸워서 이겼다." 이어서 기자가"그러면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도고는
"이순신 장군이 軍神이라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 며 "넬슨과는 몰라도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너무나 황공스러운 일이다." 라고 말했음을 전한다.또한 후일담으로 나온 이야기지만 도고 자신은 일본국민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싸워 이겼지만 이순신장군은 조정 내부의 시기와 모함하는 적과 눈앞에 대치하고 있는 적 모두를 상대 하여 이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료타로가 쓴 "메이지라는 국가"에서 쓰시마해전에서는 이순신장군의 혼령에게 도와달라는 기도를 올린 해군장교가 있었다. 미즈노 히로노리라는 해군 대위는 쓰시마해전 당시수뢰정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수뢰정이란 어뢰를 장비한 작은 전투함으로 어뢰정이라고 보면 된다.메이지해군은 쓰시마 해전에서 38척의 러시아 전함 가운데 19척을 침몰시키고, 5척을 포획하였다. 병원선 2척은 억류되고 12척만이 도주했을 뿐이다.여기에 비해 일본 측의 피해는 수뢰정 3척을 잃을 정도로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한때 적국의 장수였던 이순신에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는 것이 우리 가치관으로는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그렇게 전하니 믿어보자.사실상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헌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공과를 찾아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일본에서이순신 장군을 연구 분석한 자료에서 그 분의 참 면모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땅에 사는 후손으로써 송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와키자카 일본 장수가 있는데 와키자카는 한산도 대첩에서 지고 6일 동안 굶었다고 한다. 나라의 명을 받고 전쟁에 임한 장수로서 전쟁에 패한 것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했으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을까? 하는 생각에 젖어보지만 후에 와키자카는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워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내가 평생 동안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다.“ 라고 회고록을 통해 자손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와키자카 후손들은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4월 28일에장군의 묘를 참배하러 온다고 한다.
한, 중, 일 학자가 모여 "아세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집필에 참여한 중국의 장린교수가 북경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한 말 중에 "청나라가 망한 이유 중에는 아편 탓도 아니고 황제 탓도 아니며 정치적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중국에는 주유라는 해군 장수가 있었지만 그는 양자강에서 이름을 날리던 장수였을 뿐 바다에서 탁월한 역량을 갖춘 해군장군은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강이 아닌 海戰에 탁월한 해군장수가 있었다면 중국해안가로 몰려오는 유럽함대를 격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아울러 400여년전에 이순신 장군이 만든 당시의 거북선의 기능과 역활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우려 왔던 명나라 진린 장군은 임진왜란을 수행하면서 매번 이순신과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진린은 명나라 왕에게 올린 글에서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통제사이순신을 요동으로 부르시어 변방의 적을 치게 하소서.” 라는 상소문을 올려다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순신의 장군의 참 모습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이순신장군은 가세가 기울어 가는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8세 때 부터는 외가댁이 있는 충남 아산으로 내려와 유년생활을 보냈다. 21세에 장가를 갔는데 실업자였다. 당시에는 유일한 취업이 과거를 통한 급제인데 운도 따라주지 않았는지 28세에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낙방하고 32살에 정기적으로 뽑는 무과에 합격을 하게 된다. 그러나늦은 나이에 합격한 무과시험도 성적이 좋지 않아 장교로 임관하지를 못하고 지금 군제로 보면 하사관에 준하는 계급으로 임관하게 되었으니 이순신 장군은 군인으로서의 출발이 촉망받은 군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함경도 국경수비대로 명을 받고 군인으로서 길을 걷게 된다. 변방에서 근무하다 35세에 한성으로 돌아와 군인들의 인사 관계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고 뒤이어 충청도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된다. 36세에 전라좌수영 발포에 부대장격인 수군만호가 되었으나 3년 후 감사를 받았는데 부대가 군기보수 소홀로 책임을 물어 수군만호에서 파직을 당하게 된다.그해 함경도 훈련원 봉사로 재임명이 되었다. 39세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군관이 되어 여진족을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정 7품에 해당하는 참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 해 아버지 상을 당하면서 39세에 휴직을 하고 3년 상이 끝나는 42살에 궁중의 가마·말·목장 등을 관장한 사복시 주부에 복직을 한다.
43세살에 함경도 두만강 부근에 위치한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여진족 침입 시 방어수행미비로 직책을 파직당하고 백의종군 명령을 받고 낙향하여 대기하다가 2년 후인 45세에 전라도 감사 이광 휘하의 부관에 해당하는 군관의 직책인 조방장이 되었다. 같은 해에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 중에는 가장 낮은 직책으로 품계는 종5품 자리인지금의 5급에 해당되는 전라도 정읍현감이 되었다. 47세에 진도군수로 임명을 받고 부임하러 가는 중에 가리포 수군첨사로 명을 받았다. 그 해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직책을 명받게 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 48세인 1592년에 운명적인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여기까지 기록에 의한 자료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군인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무능에 가까운 관리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일본과의 전투에서 23전 23승의 경이로운 승전을 하게 되는데 이때도53세 때 왜군의 이간책에 휘말린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불러 고문을 하게 되고 옥고를 치루고 파직을 시켜 옥살이를 하던 중 투옥 된지 28일 만에 권률 장군이 일본과의 전투에서 연패를 당해 국가의 존망이 불안했던 조정 신하들의 권유로 선조는 아무 실권도 없이 권률장군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우연 끝에 다시 복직하여 전쟁에 임하다가 권율 장군이 전사하면서 전함 12척을 남겼는데 이 때 유명한 선조에게 올린 글이 있다.
“전하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라고 희망을 주는 보고를 올려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용기를 주게 되었다.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귀가 엷어 자기를 붙잡아 고문하고 투옥시킨 선조에게 무슨 존경심이 생겨 그렇게 끊는 충정으로 보고를 하였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순신 장군은 고문으로 인한 아픈 몸으로 군영을 독려하고 병선을 보수하여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겨보름 후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연전연승하며 54세에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니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고 조선은 전쟁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마지막 전투를 하다 선상에서 전사를 하게 되니 여기에서 이순신 장군의생애도 막을 내린다.1964년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수명이 54세였으니 400년 전나이로 봐서평균수명을 넘긴 나이였지만 우리는 민족의 영웅을 잃은 슬픔에 젖어야했다.여기까지가 우리들이 아는 이순신 장군의 생애다.
조직에서 상급자가 나를 인정해 주면힘이 나고 또 많은 실적을 쌓게 되는 법이다.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걸어 온 이력을 보면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온 힘을 쏟아 자기 본분을 다한 그 분의넓은 마음과 나라를 걱정하는 忠心을 읽을 수가 있다.
첫째 의심이 많고 소심한 선조가 자기보다 인기가 많은 이순신 때문에 불안하게 생각하며 기회만 있으면 재거하려는 주군 앞에서 무슨 힘이 나서 일본군에 항전하여 싸울 생각을 하였는가. 라는 점이다.
둘째는 국가의 지원 없이 자급자족하며 평균 신장 157cm밖에 안 되는 사람을 모아군인으로 양성시키고 일본보다 飛거리가 많이 나가는 포를 개발하고우리의 뛰어난 조선술로 海水에 튼튼한 배를 만들고 軍田을 만들어 양식을 공급하고 병참을 조달하여 어떻게 적과 싸웠을까? 하는 문제다.
셋째는 정보를 이용하고 신무기로 무장하여 원하는 장소로일본군을 끌어들여 23전 23승을 거두었는가? 하는 문제다. 현대전의 효시이고 정보전의 시작이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넷째는 54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전사했지만 45세까지는 왜 관리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변방으로 돌면서 지내다 마지막 9년 동안의 행적이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하는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데 그것이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연구해야 되는 후손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