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의 문학, 그리고 타고르의 교육


수많은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에는 공용어인 힌디어와 영어 말고도 22개에 달하는 지역어가 있다. 그중에서도 벵골어의 전통에 속한 타고르의 작품은 벵골어로 집필되었다. 결국 같은 인도인이라도 벵골 지역 이외의 사람들은 영어 번역본을 통해서만 타고르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타고르의 작품에 과연 인도 문학을 대표할 만한 자격이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인도 문학에서 타고르의 지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도 각지의 지역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인도인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인도 문학’의 대표성까지는 차마 장담할 수 없더라도, 타고르의 문학이 적어도 ‘인도인의 문학’으로서 최초로 주목받았음은 사실이었다. 가령 전형적이고 낭만적인 인도의 이미지와는 다른, 인도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타고르의 업적은 결코 폄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형식 면에서도 타고르는 현대 인도문학의 거의 전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개척자로 평가된다. 대표작으로는 시집 [기탄잘리](1910), [초승달](1913), [정원사](1913), 희곡 [우체국](1914), [암실의 왕](1914), 소설 [고라](1910), 평론 [인간의 종교](1931), [문명의 위기](1941) 등이 있다.

1930년 7월 13일, 타고르는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이듬해에 아인슈타인은 타고르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온화하고 자유분방한 당신의 사상을 만방에 전하여,
전 인류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출처: wikipedia>

타고르는 훗날 자기 작품이 모두 잊혀져도 노래는 남을 것이라고 했는데, 흥미롭게도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친숙한 타고르의 시는 [동방의 등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에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에게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가 조선 방문을 요청했으나, 일정상 불가하다며 사과의 뜻에서 이 시를 써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조국 인도 역시 식민지 상태였으니만큼 조선을 향한 타고르의 공감은 이심전심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이유로 타고르는 생전에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인도의 사회 개혁에 관심을 보인 타고르 역시 질서의식 투철한 일본인의 성향에 흥미와 호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고르는 1916년에 처음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제국주의적 야욕에 관해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일본이 다른 민족에 입힌 상처로 일본 스스로가 고통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며, 일본이 주변에 뿌린 적의의 씨앗은 일본에 대한 경계의 장벽으로 자라날 것이다.” 타고르의 예언이 정확했음은 태평양 전쟁과 이후의 역사가 고스란히 증명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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